이가람 개인전 Spring Calling Ceremony _Lee Karam Solo Exhibition

이가람 Spring Calling Ceremony Poster

 

이가람 개인전 <Spring Calling Ceremony>

탈영역우정국 2층, 2018. 03. 24 – 04. 07

Lee Karam Solo Exhibition

오프닝 리셉션 : 2018. 03. 24 토요일 오후 4시
전시장소 : 탈영역우정국 (마포구 창전동 390-11)

무료 관람 / 13:00 ~ 20:00 / 매주 월요일 휴관

후원 서울문화재단
협력 탈영역우정국

 

 

재난의 지하실에서 어째서 여전히 불행한가

이성휘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이가람을 만나러 간 날은 찬 바람 사이로 봄을 보내줄 듯 말듯 햇살이 장난치는 그런 일요일 오후였다. 그날, 그가 이메일로 알렸던 작업실의 재난은 그런대로 수습되어 있었지만, 한때 발목까지 첨벙첨벙 차 올랐던 물로 인해 장판 바닥 아래의 화학물질이 보도 블럭의 잡초 마냥 곳곳에 삐져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지하 작업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크게 인기척을 낼 때까지 작가는 노래의 볼륨에 파묻혀 있었다. 제법 넓은 지하실을 가득 채운 노래 볼륨과 사방에 널브러져 건조 중인 사물들, 모두가 지난 겨울의 한파를 이겨내느라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작가가 급히 수습한 뒤라 발 디딜 때 찌걱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자꾸 발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했다. 작업실에는 진행 중인 신작들과 과거 전시의 구작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신작은 주로 공간 가운데쪽으로 나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구작들은 벽에 붙어 있거나 일부는 해체된 채로 한 켠으로 비켜 서 있었다. 우선은 신작부터, 그리고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 구작을 작가는 마치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 혹은 애장품을 소개 하듯 돌아보며 설명해주었는데, 모두 ‘곧 무엇이 될’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완성은 최종적으로 전시장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기에,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아직 ‘곧 무엇이 될’ 것들이다.

 

작업실 방문 전, 작가가 보낸 이메일에서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그는 이번 전시가 “어떤 외부의 이야기라기 보다 좀 더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 물에서 죽었고 우리는 광장에서 싸웠고 그리고 또 다시 겨울이 왔는데 어째서 나는 여전히 불행한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하였다. 광장과 개인의 불행의 인과 관계라니 언뜻 모순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개인이 처한 여전한 상황이 한 번에 전달되는 말이기에 개인이 속한 사회에 대한 반복적인 절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이가람은 이전 개인전 《닫힌 광장》(2017)에서 무분별했던 우리 사회가 자초한 재난들과 늘 사회 주변부에 있어온 익명의 아무개들이 그 재난에 희생되거나 불행을 맞는 것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전시장에 광장을 만들고, 아무개들조차 사라진 뒤 유령처럼 광장을 배회하는 이미지들을 수집해 조각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분수(떨어지는 어둠)>(2017)은 차벽으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아무개들의 온몸에 퍼부어진 재난의 물이었다가 야속할 정도로 햇볕 아래서 하얗게 부서지며 광장 바닥에서 다시 솟아오르기도 하는 물이었다. 또 다른 <분수(구르는 한숨)>(2017)은 금속방울들이 차가운 얼음에 박혀 있다가 전시 기간 내내 녹아 내리는 얼음을 따라 굴러내렸다. 방울은 시멘트 제단 위에 멈추기도 했고, 물에 둥둥 떠있기도 했다. 멀리 가지 않은 방울에게서 슬픔이 느껴진다. 이 닫힌 광장에서 있었던 폭력, 절망, 한숨, 그리고 마침내 열린 광장. 이것이 익명의 아무개가 마침내 누명을 벗어 그간의 반복된 재난이 개인의 탓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것일까? 여전히 태연하게 솟아오르는 광장의 분수를 보며 이가람은 의문을 가진다.

 

2018년의 봄 그리고 광장 밖에서 이가람에게 좀 더 사적인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는 개인의 불행이나 불안이 재난적 장면과 중첩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좀더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부분이라 문장으로 늘어놓는 스테이트먼트를 피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친절한 설명을 부연하여 다시 메일을 보내줬는데, 이때문에 그의 이메일을 여러 번 곱씹어 읽게 되었다. 작가가 말하는 사적인 이야기는 언뜻 이번 겨울 그가 겪은 작업실 수난에 대한 좌절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실을 다녀온 뒤로 그가 최근 겪은 현실 재난에 대한 연민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서 그의 심리적이며 물리적인 상황이 조각으로 되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그의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부분을 좀더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은 그의 메일에 있는 몇 가지 키워드만 끄적거렸다(물, 표류, 침몰, 부유, 산, 실향, 노을 등). 그러면서 그가 쓰는 언어와 사물, 언어와 조각의 관계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구작들 중에서는 <펑>(2015), <쿵>(2015)과 같은 의성어 조각도 눈에 들어왔고, 앞서 언급한 2017년 개인전 《닫힌 광장》 작업들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물>(2018), <비가 새는 존재>(2018), <기춘 장치>(2018), <구르는 한숨>(2017/ 2018) 등에서도 작가의 개념이나 감정이 언어가 되고, 이것이 조각으로 형상화 될 때 어떤 공통적인 작용이 감지되었다. 이가람은 붉은색 조명을 사용한 신작 <노을 >(2018)에 대한 구상을 설명하면서 ‘제목이 없다면 누구도 노을이라고 여기지 않을테지요’라고 하였다. 의성어 작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그의 작업은 제목과 함께 읽혀야만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이가람의 언어와 사물이 만나 일어나는 작용이  통상적인 개념미술 작업에서 보아왔던 아이러니보다는 어떤 상황에 따른 심리와 감각을 상기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그의 조각은 감정이입적인 장치들이다.

 

예전 작업 중 그의 의성어 조각은 소리를 형상화함으로써 재난 이미지의 직접적인 재현을 우회했다. 소리는 시각적 실체가 없지만 요지부동한 3차원 덩어리를 가진 전형적인 조각으로 가시화 됨으로써, 우리는 소리의 원인, 즉 어떤 긴박한 상황을 떠올린다. 펑 소리와 함께 기울어지는 벽, 쿵 소리와 함께 가라앉는 배, 혹은 탕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사물에 대한 이미지와 함께, 이에 반응했던 심리적, 신체적 감각도 수반된다. 이때 의성어 조각이 언어=조각이었다면, 기성물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조각(혹은 설치)들은 언어가 일으키는 공감각적 심상이 조각으로 형상화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조각적 형상은 의성어 조각에서처럼 하나의 상황으로 다가오면서 동시에 언어에 예속되어 있다기보다는 감정이입의 대상, 즉  유기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전작 <분수>도 그랬고, 이번 전시의 신작들도 그렇다. 예컨대,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물>은 제목이 지시하는 상황이 시각적일뿐만 아니라 촉각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동시에 두가지 감각을 상상하게 된다. 눈 앞에 놓인 물리적 실체도 형광등을 지탱하는 철사가 마치 손가락 사이에서 빠지는 물을 형상화 한 것 같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밝기가 바뀌는 백색광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조각은 부동의 덩어리가 아니라 생명을 지닌 유기체 같다.

 

작업실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눈뜨고 코베인의 노래 ‘그 배는 내일 침몰할 거예요’가 몇 번 반복됐던 것 같다. 반복되는 인적 재난을 예방하지 못하는 사회. 절망이 방치될수록 분노는 터져 나갈 것 같은데, 높은 벽만 세웠던 사회. 그 벽을 허문 게 그다지 먼 시간이 아니었다. 광장에서 돌아와 익명의 아무개로 살아가는 중이지만 여전히 무너뜨려야 할 벽들이 수천 겹으로 견고하게 서 있다. 그러니 “재난의 무리가 철새처럼 우르르 왔다 갔는데 나의 재난만 뒤에 남겨진 것 같다. 물이 새는데 건물에서 새는 게 아니라 내 발뒤꿈치에서 새는 그런 느낌일까”라고 한 작가의 솔직한 말이 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탈영역 우정국 전시는 이가람이 봄을 부르는 의식이지만, 전시장 곳곳에서는 재난적 장면과 개인의 불안이 중첩되어 펼쳐진다. 그럴싸하게 그래픽 처리된 <이름 모르는 산>(2018)과 이를 마주 보고 있는 <떠내려온 땅>(2018), 작가는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 풍경이라고 말한다. 그는 움직이지 말아야 할 것들이 움직였을 때의 공포에 대해서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서 뿌리 뽑혀 부유하는 산은 관념적 풍경이면서도 비실재에 대한 공포가 형상화 된 것이다. <비가 새는 존재>와 <노을>도 서로 나란히 설치된다. 절대 아름답게 물드는 석양은 아니니, 폐허 위에 펼쳐진 인공적인 색채의 하늘과 태양은 핵 누출과 같은 대재앙을 연상시킨다. 맞은 편의 <비가 새는 존재>는 재난과 고군분투하는 개인의 모습일 것이다. 재난의 장면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물은 공포의 대상인데, 한켠에서는 잔디 위로 물을 조금씩 흘리면서 봄을 기원한다. 그리고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얼음이 녹아 방울은 점점 수조 위를 떠다닐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지난 겨울 재난의 지하실에서 출발하여 ‘곧 무엇이 될’ 것들로 이제 봄의 우정국에 당도했다. 한동안 봄은 재난 위로 쏟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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