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퍼레이드 2018 <깨무는 칸들> Kahn Parad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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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칸 퍼레이드 2018 <깨무는 칸들>
Kahn Parade 2018 <Biting Kahns>
2018. 2. 10 – 3. 4
1p.m.- 8p.m.

고등어 <BAROQUE PORNO> 시리즈, 권민호 <아내와 나 사이에 올려진 시퀸스>, 김용관 <폐기된 풍경-묘사 구조>, 김한조 <스쳐가는 칸들>, 마영신 <만화탐구사생활>, 박건웅 <괴물들>, 박근용 <천천히갈게요> 시리즈 외, 수신지 <2018년 설>, 스팍스에디션 <칸의 조각>, 신명환 <마스크>, 심대섭 <절벽> 시리즈, 심래정 <식인왕국> 시리즈, 안민희 <장미의 집>, 앙꼬 <근데 어디로 가야하나> 유창창 <형> 시리즈, 이우성 <나의 마음은 언제나> 시리즈, 이일주 <WINTER MADNESS>, 최성민 <어느 겨울에 뜬 초승달>, 최재훈 <기억 파편의 모음>, 최지욱 <탈주하는 공> 시리즈, 하민석 <추격> 시리즈, 홍연식 <만화가 기억하는 기록>

 

기획 / 신명환, 유창창
디자인 / 스팍스에디션
지원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기획자 신명환

「칸 퍼레이드」 2018

<깨무는 칸들>

나의 ‘칸’

유년 시절, 학교와 집 사이에는 낮고 너른 청보리밭 언덕이 있었다. 청보리밭 언덕 삼분의 이 지점에는 반쯤 허물어져 얼마 남지 않은 지붕과 창문의 흔적만 남은 집터가 듬성듬성 털이 빠진 늙은 개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집터라고 해봤자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의 규모에 고장난 펌프가 보초처럼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나의 ‘칸’은 그렇게 ‘봄볕 아래 졸고만 있는 늙은 개처럼 어른들이 보기에 쓸모없는 낡은 집터’였다. 그 집터, 그러니까 ‘나의 칸’이 어느 날 눈을 번쩍 뜨고는 나와 친구들을 깨문 것이다. ‘칸’이 우리를 깨문 그 순간에 보잘 것 없던 집터는 외계인의 침공을 막는 지구수비대가 되고 삐그덕 거리는 녹슨 펌프는 최첨단 레이저 방공포가 되어서 우주를 다루는 거대한 SF영화의 무대로 변신했다.

누구에게나 ‘칸’은 있다

각 자의 ‘칸’은 모두 다를 것이다. ’칸’은 만화 속에도 수없이 존재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낡은 집터가 되고 공사장의 커다란 하수도관이나 동네 어귀의 오래된 정자나무 또는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하늘일 수도 있다. 처음엔 정해진 용도로만 쓰이거나 용도를 못 찾아 비어있던 각 자의 ‘칸’이 그들을 깨무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칸’은 관찰자의 입장에 있던 각 자가 ‘칸’에 개입하여 적극적 참여자가 되고 그 ‘칸’들은 새롭고 기이한 이야기가 있는 ‘노블티(novelty)’의 ‘칸’으로 진화한다. 낡은 집터가 지구수비대의 벙커가 되듯 하수도관은 미지의 세계로 가는 지하터널이기도 하고 도시의 조각난 하늘은 다양한 그림을 보여주는 캔버스가 되는 것이다.

‘칸’은 도형적으로는 사각형의 ‘칸’을 떠올리지만 사각형 말고도 다채로운 이야기가 포함된 비정형의 모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형태의 의미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시간들의 합이다. 보통 만화는 그린다고 표현하는데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만화라는 장르는 ‘글짓기’라는 표현처럼 ‘만화짓기’라고 불러도 좋겠다. 건축에서 집을 짓는 과정과 같이 만화도 ‘칸’을 사용하는(등장하는) 주인공들과 행위들(사건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을 표현할 재료들이 준비되어져야 한다. 기본 스케치를 하고 칸과 칸을 연결하고 재료를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집이 완성되는 단계와 만화가 완성되어지는 과정은 닮아 있다. 살기 좋은 집은 그 안에 들어가 살아봐야 안다.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것처럼 만화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있는 ‘칸’을 들여다보는 일은 ‘칸’에 들어가 앉아보고 말을 걸어야 들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의 ‘칸’은 어떨까?

<깨무는 칸들>

건축가 베르나르 츄미는 라 빌레뜨 공원 설계에서 23개의 ‘폴리(Folie)’라는 다양한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공간을 제안했는데 그는 기존의 건축설계가 공간의 용도와 기능을 정하는 일이었다면 그와는 다르게 용도와 기능을 미리 정하지 않고 다양한 이벤트가 일어날 가능성의 그릇인 빈 ‘칸’으로 제공한 것이다. 공원의 이용자들이 ‘폴리’의 밖에서 ‘폴리’를 관찰할 때는 시끄럽고 괴상한 소음과 에너지들을 분출하는 곳으로 보이지만 ‘폴리’의 안에 개입해서 적극적 참가자가 되면 의도치 않았던 행위가 일어나고 자극을 받게 된다. ‘폴리’를 ‘칸’으로 대체하면 이해가 쉽다. 저마다 다른 창작자의 경험과 의도로 이루어진 세계가 빈 ‘칸’을 채우고 ‘칸’과 ‘칸’들이 만들어내는 세상 속에서 독자나 관람자는 ‘칸들’이 주는 자극을 즐기게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깨무는 칸들>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깨무는’ 행위는 ‘귀여운 공격성(Cute Aggression)’이라고 부르는데 너무 귀여워서 견딜 수 없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깨물고 싶어하는 심리로 이런 반응들은 강렬한 긍정적인 감정에 대해 정반대의 감정으로 균형을 유지하려는 행동이라고 한다. ’깨무는‘ 행위는 또한 감정이나 통증을 직접적으로 전달을 하는 매개 행위이다. <깨무는 칸들>전에 참여하는 23명의 작가들은 만화라는 ‘칸’에 깨물린 순간들이 있는 작가들이다. 만화가도 있고 일러스트레이터나 회화 작가들도 있으며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작가들도 있다. 직업은 다양하게 불리지만 만화라는 공통된 연결고리로 이들이 키우고 있는 ‘칸’을 초대했다. 그동안 단편적인 만화의 이미지나 한 부분만을 도입하고 편집한 콜라보 전시는 간간이 시도된 적은 있었으나 만화세대인 참여작가들이 각 자의 영역에서 키워온 자기 나름의 ‘칸’을 보여주는 전시는 보기 힘들었다. 작가가 작가에게, 그리고 독자나 관람자들에게 서로의 ‘칸들’로 깨물어 자극을 주는 <깨무는 칸들>의 전시가 되었으면 한다.

새로운 노블티(Novelty)를 기대하며.

「칸 퍼레이드」

「칸 퍼레이드」는 2015년 파주의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작게 시작했다. 「칸 퍼레이드」에서 ‘칸’은 만화라는 장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이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때 쓰는 필수불가결한 장치다. 또 ‘칸’은 건축에서 집의 칸살의 수효를 세는 단위고 영어로 ‘Kahn’은 핵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단위이며 1칸은 1만 메가톤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래서 「칸 퍼레이드」는 작지만 큰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는 자신만의 ‘칸’을 쌓아나가고 있는 작가들의 행진 같은 것이다.

만화라는 장르는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장르로 만화는 인쇄기술의 발달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회화나 기타 다른 장르의 예술은 원본을 감상하고 소유하는 방식으로 인해 소수의 계층만 이용하는 예술이었다면 만화는 수많은 자기복제를 거쳐 대중들에게 전해졌고 그 파급력으로 인해 대중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여가문화이며 예술의 민주화(소비자와 창작자 모두)를 이루게 한 장르이다. 19세기 후반 질 낮은 종이에 인쇄된 일러스트레이션 잡지들이나 신문의 인기는 곧이어 같이 실린 만화에 의해서 신문의 흥행이 좌지우지 될 정도가 되었고 현재는 새로운 복제기술과 스마트기기라는 플랫폼을 만나 만화가 화려한 꽃을 피우는 시기이다. 7,80년대의 만화잡지 시대를 거쳐 만화방같은 한정된 공간에서만 만화를 읽던 시대를 지나 남녀노소 누구나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웹툰을 보는 시대에 와 있다. 「칸 퍼레이드」는 웹툰의 홍수 속에서 노아의 비둘기가 휴식을 취하는 바위같은 것이다.

참여 작가 김용관

<공상 예술 만화>

만화는 재밌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화적’이라는 수사를 거부한다. 만화들이여. 각성하라. 더는 참지 마라. 자신을 보호하고 주장하라. 간 큰 도둑이 칸을 훔쳐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마라. 그것은 내 것이라고 외쳐라. 미술이 만화를 확장의 수단으로 삼지 못하게 하라. 만화를 하위문화로 폄하하며 시혜적 애정을 표하고 캐릭터를 훔쳐가는 마이너 장르 예술가를 기억하라. 아무런 연성 거리도 제공하지 않는 허울뿐인 껍데기에 속지 마라.

“왜 만화를 전시하려고 그래.” 전시 준비를 위한 첫 모임에서 마영신 작가님이 꺼낸 말이다. 전시를 열기도 전에 김 빼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말은 전시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을 정확하게 일러준다. 만화를 전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만화책을, 웹툰을 쓰고 그리는 것과는 다른 것일까. 만화는 시각언어와 문자언어를 함께 다루는 예술이다. 동시에 칸의 예술이기도 하다. 칸과 칸 사이에는 시공간의 변화가 있다. 찰나의 시간부터 영겁의 시간까지. 각설탕만큼의 공간에서 우주적 공간까지. 칸과 칸에 담을 수 있다. 칸의 크기와 모양은 미디어(정보를 전송하는 매체)에 따라 달라진다. 만화책에 적합한 칸의 크기와 모양이 있고, 웹툰에 적합한 칸의 크기와 모양이 있다. 만화를 전시한다는 것은 만화의 미디어가 만화책과 웹툰이 아닌 입체적인 시공간으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독자(視讀者)의 가변적 위치와 시점(근시와 원시를 포함하는)에 맞는 새로운 시각 구성이 필요하다. 이는 만화 형식에 대한 실험이다. 형식이 바뀌면 담을 수 있는 내용도 달라진다. 결국, 만화 그 자체에 대한, 언어와 칸에 대한 도전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문학은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명확하지 않은 말—부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마음, 존재, 분위기, 상황, 사건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다른 문장으로 대체 불가능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글을 문학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만화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만화는 정확성을 추구하는 예술일까. 만화의 문자언어는 어떤 마음, 존재, 분위기, 상황, 사건을 온전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시각언어와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을 나누기 때문이다. 만화의 시각언어는 회화의 시각언어와 달리 기호화되어 있다. 만화는 회화처럼 한 컷(칸)으로만 말하는 예술이 아니다.* 한 칸(컷)의 밀도를 낮추고 일관성 있게 시각언어를 이끌어가야 한다.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려오며 습득한 자신만의 스타일—기호화된 이미지는 정확하지 않은 말이다. 부사 같은 말이다. 다른 스타일—기호화된 이미지로 대체 가능한 말이다. 하지만 부정확해서, 부사 같아서, 기호라서 진실을 여러 갈래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지 않기에, 시독자(視讀者)로 하여금 진실에 신중하도록 만든다.

<마징가Z>로 잘 알려진 나가이 고(永井豪)의 문제작 <파렴치 학원>은 처음으로 판치라(パンチラ)를 그린 만화다. 이 작품에선 특별한 맥락도, 이유도 없이 팬티를 노출한다. 소년지 독자를 위한 일종의 서비스 컷이다. 전국적으로 히트를 친 만화로 여기서 묘사된 아이스케키(치마 들추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할 정도였다. PTA를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의 항의를 받았고 논란이 되었다. 만화를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과 표현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는 입장으로 전선이 만들어졌고, <파렴치 학원>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저항정신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비판이 거세질수록 <파렴치 학원>의 수위도 높아져만 갔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것, 여성을 성적으로 자유롭게 묘사하는 것이 곧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결국 <파렴치 학원>은 싸움에서 승리했고, 그 이후 일본 만화에서 판치라 코드는 자연스러운 것, 문제시되지 않는 것이 되었다. 비약하자면 미소녀, BL, 백합, TS, 오토코노코(男の娘) 등 캐릭터를 대상화하는 오타쿠/모에 문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방식엔 동의하지 않지만, 메갈리아의 미러링 운동은 내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OO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미투 운동, 백래시 현상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부정해야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컨텐츠의 상당수는 왜곡된 여성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제는 그것이 불편하다. 그럼에도 그 만화들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보고, 읽는다. 나는 파렴치하다.

*만화는 한 칸 또는 한 칸 이상의 칸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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